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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의 듀나(Dunja)씨의 칼럼]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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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stipe 2006. 5. 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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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게 학생 탓이랴  - 듀나(Dunja)

올해부터 서울지역 초중고 학생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교총에서 스승의 날을 자율휴업일로 정한다고 정한 게 작년 일이니 초·중·고교 교장협의회의 발표는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이 날만 되면 촌지수수 등 교육부조리 문제가 거론됨으로써 오히려 교권이 떨어지고 교직사회의 신뢰가 추락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는 데 이해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냉소적이 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공식 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부터 금지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진지한 발언이다.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어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논리는 자명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스승이란 불필요하게 높은 단어다. 교사만으로도 충분하고 많은 사람들은 종종 그 단어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면 교사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소정의 자격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럼 일반적인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별 거 아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 그걸 내가 억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너 개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직업에 어울리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준을 강화하고 교육을 시키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고 부적절한 인물들을 솎아내는 것이지,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르게 강요하고 지킬 수도 없는 기준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권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스승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환경 속에서 정상적인 직장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 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다.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일에는 단계와 한계가 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건 노력과 실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스승의 은혜’가 강요하는 기준이 불가능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습관적으로 낭송하지 말고 그 가사를 한 번 의미를 되새겨가며 읽어보라. 황당하기가 무협물 주제가 같다.

  교사는 존경받을 필요 없다.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존경받는 교사가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건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교사가 인격적으로 뛰어나다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그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 적 없고 노인네들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 지금의 우리 학교는 정반대이다. 존경의 대상이 없는 시스템 속에서 존경에 대한 강요와 자화자찬만이 존재한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되어도 교권 회복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주인장 논평]  이 친구의 글은 공감이 갈때도 많지만 가끔은 쌩뚱맞은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는 조금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정말 난 내 직업 알리긴 싫은데, 가끔 이런 글들이 나타나면 결국 내 직업을 밝히는 셈이 된다.) 자신의 글을 통해서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사람들이 '발끈'해서 그 밑에 악플을 달게 만들어 그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대중에게 비춰지기를 기대하려고 일부러 이런 톤으로 쓴 것 같은.... 그래서 어느정도 내용에 공감이 가도 글을 읽기가 정말 부담이 간다. 그래서 듀나씨가 왜 이런 사고를 갖게 되었을까에 대한 배경과 교사가 현재 '만인에게 쉽게 씹히는 대상'이 된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사실 한국이란 땅에 근대식 교사가 양성된 것은 일제시대 사범학교 체제가 확립된 이루라고 해야 맞을거다. (그 유명한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도 사범학교 출신이라는건 다 아시죠?) 그 때의 사범학교 양성목표는 단연 제국주의 교육의 첨병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 세대에 나온 1세대 교사들이 결국 해방 후에도 교육계를 장악하면서 일제시대 교육의 틀은 그대로 대한민국 교육형식에 전이되었다. 그리고 70년대 유신 시대를 거치며 군사정권은 학교를 '작은 군대'화 하고 싶어했으며, (한겨레 신문에도 언급되었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의 일상화, 교련교육의 강화 등은 바로 그런 시대의 소산이라고 해야 맞다.

  여기서 우리는 교사 양성 방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가 현재 공교육 교사집단의 평가가 왜 이지경까지 왔는가에 대한 일말의 해답이 될 거 같다. 초등교육이야 그 때나 지금이나 꾸준히 교대가 담당해왔지만, 중등교육의 경우 사범학교는 마치 전문대 수준이었고, 학교가 기하급수적으로 7-80년대에 늘어날 때, 그리고 사립 중-고등학교가 국가의 책임을 일정부분 떠 맡을때 (자격증으로는 교사 수를 채울 수 없을때 자격을 확인받지 못하고 적당히 들어온 교원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국립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4년제 대학이 사범대학을 단대화 한것은 거의 70년대 말-80년대 초다.) 그리고 전두환정권부터 김영상 정권까지 - 국가 분위기가 대기업에 집중되고, 고급 사(師)자들 - 판,검사, 의사 등 - 처럼 '돈 잘버는 직업'이 선호의 우선순위였을 때, 인재들은 학교로 가지 않았다. (필자가 근무하는 직장인 모 사학에서도 처음 기업주가 학교를 세울 때는 한국의 MIT를 꿈꾸며 설립하고 교원을 끌어 모았다는데, 80년대로 넘어오면서 교사의 과외 금지가 실시된 이후, 실력있는 교사들은 모두 대학교수나 다른 방향으로 튀어버렸다고 모 원로교사는 증언했다.) 심지어 필자가 사대에 입학한 90년대 초반 수도권 일류대학 사대의 입시 경쟁률은 3대 1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 교실 분위기에서도 아이들의 인식은 '돈 잘 벌데 많은데 겨우 선생이나 하려고?'하는 의견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즉, '굵고 짧게 돈벌어 살자'가 아닌 '가늘지만 길게 버티고 살자' 사고를 가진 이들이 교사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쩌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이런 배경 속에선 무조건 욕할 것 만도 아닌 것이다.

  결국 경제 우선주의로 인해 교육에 대한 투자는 90년대 후반전까지 70년대 수준으로 고정시켜놓고, 좋은 인재가, 훌륭한 지식,인성 전달 능력을 갖춘 교사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것 부터가 무리였던 것이다. 돈 조금 줘도 부려먹을 수 있는 공무원으로 만들어놓고 적은 비용으로 교육 제도를 운영하려고 한 것이다. 교사들의 실질임금 상승 요구는 각종 수당을 제정하여 본봉의 비율로 지급하면서 그 원성을 무마하는 방식을 취하다보니 어느덧 교사들의 실 수익이 많이 향상되기는 했는데, 그러다 IMF가 터지고, 실업이 주변에 널려가는 시대로 접어들자, 교사는 하급 공무원들 보다는 적어도 월급 잘 받는 '철밥그릇'이란 이유로 졸지에 인기직업으로 급상승했고, 신랑-신부감 상위권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는 경제의 무한 경쟁속에 타의로 낙오된 이들에게, 그리고 그 경쟁 속에 진입 못하고 힘겨워 하는 같은 민중들에게도 그들을 '시기의 대상' 으로 낙인찍는 결정적 배경을 제공했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배경을 통해 자질 없게 들어온 일부 교사들의 무일관성한 모습들에 상처를 받아온 한 세대가 이미 사회의 중심 오피니언 게층으로 자리잡은 시점에서 그들에게는 교사가 당연히 '능력도 없이 세금 축내는 벌레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벌레'들이 존재한다는 듀나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전체의 통제'를 위해 체벌과 언어폭력을 남용하거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 못하는 교사, 학부모와 만나는 것을 과도하게 즐기며 여러 학부모와 면담을 요구하는 교사들까지, 일부 그런 교사들을 내가 전혀 안 봤었다고는 나도 말 못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시대를 맞아 그런 시선은 더욱 익명적으로 거침없이 퍼져나갔고, 그 속에는 조중동 보수신문만큼의 가식적 논리조차도 빠진 감상적 비판들만이 난무한다. 마치 부적절한 교사들만 솎아내고 교사들을 경쟁만 붙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비춰지는 수많은 댓글들... 한 번 생각해보라... 일반기업의 예를 보더라도 자신이 중요한 과오가 없이는 정년보장이란 조건을 보고 입사지원했는데 갑자기 계약직으로 돌변하고 실적에 따라 모가지가 왔다갔다 한다면 그 조건을 순순히 받아줄 노동자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를... 결국 노조에 의지하고 (결과가 어찌되든) 생계를 위한 투쟁에 나설수 밖에 없을것이다. 내가 볼 때 교사 집단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똑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론은 교사 집단의 시선에서는 (어떤 의도로 말했든) '우리도 불안한 밥그릇'이니까 '너희도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배가 안 아파!'라는 논리로 읽혀지기에 쉬운 말들을 내뱉는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말할것인지....

  당연히 공교육의 조건은 개선되어야 하고, 인성적으로 부적격한 교사는 그것이 외형적 사건으로 드러났을때 형사법을 통해서라도 퇴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수 능력의 면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자신이 버거워서라도 그만두거나 다른 직업을 알아볼 수 있는 분위기만 형성되면 된다. 그러나 교육이 교사들만 잘 한다고 다 해결될 것으로 편하게 생각하는데는 논리적 무리가 따른다. 노무현 정부들어서 공무원이 너무 많이 늘었다고 연일 언론에서 비판이다. 그 논리에는 필요하지도 않은 부서를 만들어서 인원만 늘린다는, 그래서 국민 세금 축낸다는 이유라도 있다. 그런데, 과연 현재의 학교 교사가 필요없는 인원이 그렇게 많아서 동일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가?

  만약 공교육 영어 교사가 2년간 휴직하고 TESOL(비영어 사용자의 영어교육학 석사과정) 유학을 하겠다고 교장이나 교육청에 요청한다면, 교육청은 휴직기간에 수당주기 아까워서, 학교 교장은 기간제 고용하고 번거로운 절차 이행하기 부담스러워서 난색을 표하는게 현실이다. (1정연수때 만난 어느 교사는 2년 어학연수가려고 교육청까지 가서 무지하니 싸워서 쟁취했단다.) 이런 환경에서 교사가 언제 자기 개발을 하고 시류의 변화에 쉽게 적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조건보다 더 먼저 구조조정의 철퇴성 발언이 난무하면 교사들은 자신의 능력과 자질에 상관없이 자신의 밥줄을 위해 연대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능력있는교사'나 '무능교사' 모두에게 '철밥통'은 공통으로 소중한 것이란 걸 모르는가?

  나도 내 직업적 입장에서 '존경받는 스승'이란 소릴 들을 자격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냥 내 능력만큼 학생들의 기억과 인식에 남는, 아이들과 소통할 줄 아는 교사이고 싶다. 그래서 듀나씨가 이야기한 '스승'의 의미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세상엔 이런 기준애도 미치지 못하는 교사가 넘쳐난다'는 그의 말에는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의 경험에 근거한 과일반화의 식견이 어느정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어떤 면에서는 교사집단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할 거리를 제공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인생 34년을 살면서 한가지 깨닳은 인긴 심리의 불변의 공식은 아무래도 이것인것 같다.

'사람은 자신의 밥그릇(생계)이 달린 문제에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척 하는 이도 결국 보수적이 된다."

  결국 일자리가 목숨이 되는 시대에 서로의 밥그릇에 대한 것을 건드리는 식으로 어떤 직업 집단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 감정적인 응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쓰고보니 어쩌면 이 글은 듀나씨에 대한 비판은 별로 안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근데 영화나 소설 평론쪽에 전념하시지 이런 쪽 글을 써서 결국 상반된 의견만을 소모적으로 논쟁하게 만든 계기를 만드신 면에서는 듀나씨가 좀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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